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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혹 오랫만에 만나는 옛 친구들에게서 “아깝다”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그럴때 마다 내 마음은 다소 서먹하고 서운했었다. 뭔가 내가 할 일을 못하고 산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기억하는 학창시절의 내 모습과 집에서 아이들이나(?) 키우고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의 모습이 맞아 떨어지지 않아서였겠지. 한마디로 친구들은 내가 한 여자로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의 여부보다도 사회에 공헌하는 직장인으로 일하지 않고 지나는 모습에 실망한 것이리라. 이차대전과 육이오를 겪으면서 한국의 정치적 격랑틈에 일찍부터 부모님을 여의고 조부모님 슬하에서 성장한 남편과 대학에 들어 간지 몇개월만에 우리는 열애에 빠졌고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의 연애 시절을 거쳐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자신에게 내 생애의 가장 중요한 약속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리라는 것이였다. 감상적인 꿈이였나? 지금 내 남편이 서울 의과대학 재학시인 辛丑 6月 25日에 조부님께서 사랑하는 독자 종손 성구를 위하여 “爲 孫子 聖九 題” 로 “將仁術 爲一生之業 窮眞理成百世之師” 라는 현판을 써 주셨는데 그 현판은 남편 서제에서 가보 제 일호로 군림하며 생활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일찍이 미국 오하이오에 유학오셔서 1929년에 오버린대학을 졸업하신 조부님의 가르치심을 받들어 남편은 인술로 만인을 돕고저 희망에 부푼 꿈을 안고 도미하였고 우리는 슬하에 세 아이들을 낳아 누구의 도움없이 아이들 키우느라고 나는 세상 물정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 상관않고 살았다. 자식들에 대한 포부가 크셨던 친정 어머니의 권유로 OSU에 틈틈이 다니며 젊은 야심을 살려 보려던 때도 있었으나 남편과 세 아이들 앞에 그 꿈은 하나의 사치였고 낭만이였다. 나의 세계는 오로지 남편과 아이들과, 아이들의 학교, 아이들의 친구들과 그들의 부모들, 과외활동들을 통해서 연결되었다. 우선 자동차 운전 면허를 따야 했고 성장해가는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학교를 다니며 언어의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들어보지도 못하던 스포츠의 Rule도 아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배웠다. 우리가 미국사회의 문화와 풍습에 어두운 것을 고려하여 경제적으로 무리가 되었음에도 아이들 셋을 모두 사립학교에 넣었다. 돌이켜 보면 뱁새가 황새를 쫒아 다닌 셈이다. 다행히 세 아이들 다 명문 사립대학을 보낼 수 있었고 딸 둘은 저희들의 뜻대로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었다. 아들은 당시의 Asian Male 들의 Stereo Type Image을 벗어나 공부만이 아니고 자기의 개성과 창작성을 살리며 운동, 음악, 연극등 분야에 적극 참여하더니 독창력을 발휘하는 사업계에 뛰어 들었다. 셋 다 자기들이 선택한 배우자와 결혼하고 사회에 떳떳한 일군으로 활약하고 있으니 나는 마치 내 자신이 그들의 학위와 업적을 성취한 듯이 자랑스럽다. 이제 나는 그들 사이에 태어 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 손녀들에게 너그럽고 자애로운 할머니노릇 하기에 정신없으리 만큼 바쁘고 즐겁다. 지나간 어느날의 일기를 도리켜 본다.
우선 신문을 집어 들곤 꽃밭을 둘러 본다. 밤새 꽃송이속에 앉아 꽃잎을 포식하고 앉은 얌채 밉생이 풍뎅이놈들을 한놈 한놈 잡아 비눗물에 잠수시키며 소탕 작전을 벌린 후 서둘러 아침 산책길에 오른다. 오늘따라 습기도 가시고 살랑 바람마저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아침이다. 아침 기온 화씨 65도다. 집을 나서서 골목을 빠져 나와 동북쪽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오늘 아침 산책에는 목적이 있다. 이십여분 걸어서 Market Street에 자리잡은 Star Bucks에 들려 Coffee 한봉다리를 사는 일이다. 햇볕에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로 파아란 하늘에 뭉게 구름이 피어나고 이집 저집 앞뜰에는 가지 각색 여름 꽃들이 찬란히 또는 점잖케 고개들고 아침인사를 한다. 골프장을 끼고 걷는 산보길에는 골프장 Rough Area에 피어 있는 온갖 들꽃들이 여름 잔치를 벌리며 지나는 길손을 반긴다. 걸으면서 지나가는 차속의 출근하는 이웃들과 손 흔들며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미소와 함께 “Good morning!” 또는 “Beautiful morning!”을 동네 산책인들과 나누기도 한다. 이집 저집, 이골목 저골목의 각가지 색다른 집 모습이며 정원을 살펴 보며 내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생각한다. 지금 의식 불명이 되어 생사를 헤메고 있는 친구가 기적적으로 깨어나기를 바래 보며, 그리워 하며, 이생각 저생각, 혼자만의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면 한 시간이 어느새 가고 내집 마당에 서게 된다. 뒷뜰악의 꽃들에게 밤새 문안을 드릴 차례다. 오늘은 흰 장미가 피었고 백합은 그만 한 물 갔구나, 도라지도 그만 맥을 잃었고 Black Eyed Susan과 Petunia, Impatiens, 백일홍, 봉숭아, 코스모스는 한창이다. 한소큼 시원하게 물을 뿜어 주고 시도 때도 없이 자라는 잡초도 뽑아 준다. 이집을 짓고 이사 들어 온지 육년이 되니 꽃과 나무들이 제법 성숙하여 금년 여름 뜰은 화려하다. 더구나 디스크 수술을 받은 후 골프를 고만 두고 나니 시간이 많아 꽃들에게 정성쏟기를 아이들 돌보듯 하니 꽃들이 그런 내 마음을 아는 듯 다투어 피어 서로 칭찬을 받으려는 듯 닥아 온다. 갖가지 벌, 나비, 벌새, 새들이 놀러 온다. 물론 불청객인 Japanese Beetle도 끊임 없다. 장미만 먹지 않으면 그냥 두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눈만 뜨면 나는 고놈들 소탕을 해야한다.' 한달에 두어번 친구들과 점심 모임이 있다. 한 모임은 모두 한국인 친구들인데 멤버가 이사가고 이사오는 바람에 여럿이 바뀌기는 했으나 사십 이년째 계속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어린 아이들 데리고 모여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북석을 떨었건만 아이들이 다 크고 떠난 후에는 어찌된 일인지 넓은 집 두고 음식점에서 만나서 떠들다가 헤어진다. 그중에 이미 두 친구가 유명을 달리했다. 또 하나는 일곱명의 Museum Docent 친구들 모임인데 이날만은 자기들의 개성있는 살림들로 풀먹인 상보를 깔은 Formal Dining Room에서 낮인데도 촟불을 켜고 Wine을 겯드리는 Luncheon Group이다. 모두 나보다 연세들이 높으신 분들이고 점점 나이 들면서 힘이 들건만 이런 Victorian Style의 Ladies’ Luncheon을 포기하려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Current 시사, Art, 자기가 읽은 책소개나 여행담으로 화제의 꽃을 피우고 읽은 책을 서로 교환도 하는데 늘 시간이 모자란다. 이 친구들은 이곳 사회, 문화에 나를 이끌어 주는 나의 Mentor들이고 형제들이다. 모임 이름은 옛 시절에 아이들 키우며 살림하던 때, 함께 모여 바느질하곤 했다 해서 “Stitchery”, 지금은 한땀 한땀 우정을 잇는 모임이라는 Metaphor이다. 뒤 늦게 내가 member가 된지 어언 이십년이 넘었다. 그사이 홀로 된 분도 있고 한분은 스트로크를 당하여 요양중이다. Museum에 나가서 Docent(Volunteer Teacher)로서 봉사활동을 한다. 내게는 봉사라기 보다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Intellectual한 친구들을 만나고 내가 살고 있는 미국사회속에서 활동하며 봉사하는 기회이기 때문에 이 기회가 주어진 것을 감사히 생각하며 열심히 시간을 쓴다. 새로운 전시회가 열릴때 마다 강의를 듣고 미술관에 견학오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육을 받고 책을 읽고 공부한다. 나에게 늘 지적으로 Challenge를 주는 만년학교라고 생각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봉사를 기쁘게 하고있다. 2016년 유월말에 삼십년을 채우고 은퇴할 예정이다. 이 미술관 관계로 재미있는 모임이 또 있다. Art Book Club이다. 15-20명의 Docent들이 격월로 미술계에 관한 서적을 선정하여 읽고 모여서 토론하는 모임이다. 때로는 특전을 찾아 갤러리를 함께 찾아 간다. 관련된 영화를 함께 감상하고 토론하기도 한다. 미쳐 책을 읽지 못해도 참석한다. 나의 이곳 문화에 Assimilate하는데에는 아직도 노력이 필요하다. 틈틈이 멀리 떨어져 사는 아이들을 차례로 보러 가고, 여행도 하고, 그러노라면 어느새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더구나 지난 유월 말로 남편이 삼십 팔년 종사하던 직장을 고만두고 은퇴를 하고 보니 우리는 거의 24시간을 함께 지내는 셈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우리는 한방에 있다. 처음에는 옛날 연애하던 기분으로 돌아가 새삼 다정한 사이가 되었는데 다정도 병이라던가, 서로 모르던 버릇이 보이기도 하고 서로 이견이 많은데에 새삼 놀랄적도 있다. 이래 저래 우리는 백년 해로하는 부부가 아닌가, 서로를 더 배워가며 산다. 나는 한국인 친구들이 즐겨 시청하는 한국 영화 비디오를 아직은 빌리러 다니지 않는다. 향수를 달래고 추억을 불러오는 달콤하고 구수한 멜로 드라마가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정서를 부드럽게 한다고 친구들이 권하는데 내게는 아직 안이한 사치다. 미국에 살면서 한국에서 살듯이 하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영어를 더 유창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세상 물정을 듣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라고 성장한 영어권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한국 비디오를 보며 안락하게 지낼 수가 없다. 책도 가급적이면 영어로 읽는다. 추위를 피하려고 캘리포니아에 가면 친구들도 만나고 한국 드라마를 즐길 수 있는게 내게는 기다려지는 크나 큰 보너스다. 고마운 것은 나의 남편이 아직도 자기의 건강관리에 게으르지 않고 세 아이들이 각자 성실히 자기들의 자리를 견고히 하고 사회에 공헌하면서 자기들의 삶을 즐기고 있는 점이다. 두 딸들은 산부인과 의사로 함께 미네아폴리스에서 Private Practice를 하고 있고 아들은 Manhattan에서 건축 사업으로 뛰면서 바쁘게 일하며 모두 내몫까지 하듯이 열심히 산다. 슬하에 각각 세 자녀를 두었다.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고마운 축복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자같은 안사람으로, 셋이 여섯이 된 성장한 자녀들의 어미로, 아홉으로 늘어난 손자, 손녀들의 할머니로 나는 늘 시공을 뛰어 넘는 Happy Family Affair를 관리하노라고 또 역시 바쁘다. 년례 가족 휴가 스케쥴을 맟추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 모두 직장생활에 바빠서 이 일은 나에게 일임한다. 나만큼 시간적이나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나의 작은 우주속에서 내 나름대로 이리 저리 바쁘게 지내느라고 “아까운”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는 눈, 코 뜰새 없이 바쁘게 사는 딸들에게 미안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며느리는 세 아이를 키우는 가정주부인데 만하탄 생활은 오하이오에서 사는 내 생활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복잡 다단한 일과로 살아가니 때로는 안쓰럽다. 몇년전 서울 신라 호텔에서 내려다 본 남산의 소나무 숲은 한강 변의 기적처럼 보였지만 우리가 자랄때 매년 식목일마다 심은 묘목이 커서 울창해 진것 아닌가!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반세기 세월이 흐른 뒤니까. 이번 추수감사절 휴일에는 세 아이들이 손주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집에서 모였다. 만 열여섯살이 된 큰손자를 비롯하여 세살 반짜리 손자까지 도합 아홉명의 손주들과 세 아이들 내외 여섯, 우리 두 양주까지 합하여 열 일곱식구가 한 지붕아래에서 나흘을 지내고 갔다. 도착하자 마자 지하층에 내려가서 자기 엄마, 아빠, 이모, 외삼촌이 가지고 놀던 사십년이 된 옛날 작난감들을 꺼내놓고 순식간에 발 디딜 틈 없는 수라장을 만들지만 평온하게 지난 세월이 새삼 따뜻이 안겨와서 나는 그지없이 흐뭇하기만 하다. 고녀석들 떠난 뒤 텅 빈 방들을 둘러보면 서운함이 밀물처럼 밀려 오지만 마구 흐터진 장난감들을 하나 하나 선반위에 줄 세우며 지나간 사십 칠년 세월을 손 안에 만지는 내마음 저 바닥에는 잔잔한 희열의 물결이 인다. 겸허한 이런 나의 자리는 결코 헛된 자리도 아까운 인생이 흘러 가버린 자리도 아님을 나는 안다. 나의 지나간 날들이 키워 준 울창한 숲이다. 아름드리 나무로 가득하리라. 거기에 나는 기꺼이 걸음이 되려니... PS;This essay was written last December for my high school class bulletin. |
Thursday, June 25, 2015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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