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깝다!”
김 승자
12/03/2014
나는 간혹 오랫만에 만나는 옛 친구들에게서 “아깝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럴때 마다 내 마음은 서운했었다. 뭔가 내가 할수 있는 일을 다 못하고 산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기억하는 학창시절의 내 모습과 집에서 아이들이나(?)
키우고 있는 가정주부의 모습이 걸 맞아 떨어 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한마디로 친구들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행복한가의 여부보다도 사회에 공헌하지
못하고 살림만 하는 일개 가정 주부로 지나는 모습에 실망한 것이리라.
한국의 정치적 역사적 격랑틈에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조부모님 슬하에서 성장한
우리 남편과 대학에 들어간지 몇개월만에 우리는 열애에 빠졌고 오랜 기간 동안의
연애 시절을 거쳐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남편 몰래 내 자신에게 내
생애의 가장 중요한 약속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꾸미겠다는 것이였다.
당시 의과 대학 재학시인 辛丑 6月 25日에 조부님께서 사랑하는 독자 종손을 위하여
“爲 孫子 聖九 題” 로 “將仁術 爲一生之業 窮眞理成百世之師” 라는 현판을 써 주셨는데
그 현판은 지금 남편 서제 벽난로 위 벽에서 가보 제 일호로 군림하며 생활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1929년에 미국 오버린 대학을 졸업하신 조부님의 가르치심을 받들어
남편은 인술로 만인의 지도자가 되고저 희망에 부푼 꿈을 안고 도미하였고 우리는
슬하에 세 아이들을 낳아 누구의 도움없이 세 아이들 키우느라고 나는 세상 물정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 상관않고 살았다.
한때는 자식들에 대한 포부가 크셨던 친정 어머니의 권유로 OSU에 다니며 젊은
야심을 살려 보려던 때도 있었으나 남편과 세 아이들 앞에 그 꿈은 하나의 사치였고
낭만이였다.
내가 적응하여야 하는 미국사회는 오로지 남편과 아이들과, 아이들의 학교,
아이들의 친구들과 그들의 부모들, 과외활동들을 통해서 연결되었다. 성장해가는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학교를 다니며 언어의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sports의 Rule도 아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배웠고, 요리도 아이들의 기호를 따라서
서양요리를 시도하기도 하면서 살았다. 미국사회생활에 Accomodate 하느라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때였다.
우리가 미국사회의 문화와 풍습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고려하여 경제적으로 무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셋을 모두 사립학교에 넣었다. 돌이켜 보면 뱁새가
황새를 쫒아 다닌 셈이다. 다행히 세 아이들 다 명문 사립대학에 다니게 되었고
딸 둘은 저희들의 뜻대로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었다. 아들은
당시의 Asian Male들의 Stereo Type Image을 벗어나 공부만이 아니고 자기의 개성과
창작성을 살리며 운동, 음악, 연극등 분야에 적극 참여하더니 독창력을 발휘하는
사업계에 뛰어 들었다.
셋 다 자기들이 선택한 배우자와 결혼하고 사회에 떳떳한 일군으로 활약하고들
있으니 마치 내 자신이 그들의 학위와 업적을 vicariously 성취한 듯이 자랑스럽다.
이제 나는 그들 사이에 태어 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 손녀들에게
너그럽고 자애로운 할머니노릇 하기에 정신없으리 만큼 바쁘다.
어느날의 일기를 도리켜 본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남편에게 도시락을 싸들려 배웅하며
앞뜰에 나서서 우선 신문을 집어 들곤 꽃밭을 둘러 본다. 밤새
꽃송이속에 앉아 꽃잎을 포식하고 앉은 얌채 밉생이 풍뎅이들을
한놈 한놈 잡아 비눗물에 잠수시키며 소탕 작전을 벌린 후 서둘러
아침 산책길에 오른다. 오늘따라 습기도 가시고 살랑 바람마저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아침이다. 아침 기온 화씨 65도이다. 집을 나서서
골목을 빠져 나와 동북쪽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오늘 아침산책에는
목적이 있다. 이십여분 걸어서 Market Street에 자리잡은 Star Bucks에
들려 Coffee 한봉다리를 사는 일이다. 햇볕에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로
파아란 하늘에 뭉게 구름이 피어나고 이집 저집 앞뜰에는 가지 각색
여름 꽃들이 찬란히 또는 점잖케 고개들고 아침인사를 한다.
골프장을 끼고 걷는 산보길에는 골프장 Rough Area에 피어 있는 온갖
들꽃들이 여름 잔치를 벌리며 지나는 길손을 반긴다. 걸으면서 지나가는
차속의 출근하는 이웃들과 손 흔들며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미소와
함께 “Good morning!” 또는 “Beautiful morning!”을 동네 산책인들과
나누기도 한다. 이집 저집, 이골목 저골목의 각가지 다른 집 모습이며
정원을 살펴보며 내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생각한다. 지금 의식 불명이
되어 생사를 헤메고 있는 친구가 기적적으로 깨어나기를 바래 보며,
그리워 하며, 이 생각 저생각, 혼자만의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면
한 시간이 어느새 가고 내 집 마당에 서게 된다. 뜰악의 꽃들에게 밤새
문안을 드릴 차례다. 오늘은 흰 장미가 피었고 백합은 그만 한 물 갔구나,
도라지도 그만 맥을 잃었고 Black Eyed Susan과 Petunia, Impatiens,
백일홍, 봉숭아,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한소큼 시원하게 물을 뿜어 주고
시도 때도 없이 자라는 잡초도 뽑아 준다.
이사 들어 온지 육년이 되니 꽃과 나무들이 제법 성숙하여 금년 여름 뜰은
화려하다. 더구나 디스크 수술을 받은 후 골프를 고만 두고 나니 시간이
많아 꽃들에게 정성쏟기를 아이들 돌보듯 하니 꽃들이 그런 내 마음을
아는 듯 다투어 피어 서로 칭찬을 받으려는 듯 닥아 온다. 갖가지 벌,
나비, 벌새, 새들이 놀러 온다. 물론 불청객인 Japanese Beetle도 끊임 없다.
장미만 먹지 않으면 그냥 두겠지만 그럴 수 없다. 눈만 뜨면 나는 고놈들
소탕을 해야만 한다."
"오늘은 곗날이다. 이 모임을 시작한 건 어언 사십년 전이었다. 이사간
친구들도 있고 그새 저 세상으로 가버린 친구들도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어린 아이들 데리고 모여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북석을 떨었건만
아이들이 다 크고 떠난 후에는 어찌된 일인지 넓은 집 두고 음식점에서
만나서 떠들다가 헤어진다. 오늘 모임에서는 지난달 스위스 여행중
유명을 달리한 친구의 이야기로 눈물을 흘릴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모여
가버린 친구의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은 Stitchery 친구들이 오는 날이다. 아침부터 집안을 말끔이
정돈하고 어제밤에 dining room 식탁에 Table cloth를 덮고 China, Silver,
Crystal를 꺼내어 식탁을 차려 놓았다. 꽃집에서 사온 꽃꽂이 화병도
색갈이 어울린다. 메뉴는 Asparagus Soup, Beet Salad with Peach,
Grilled Salmon, 디져트로는 Tiramisu. 뜻밖에 Sylvia가 몇달 전에
스트로크를 당하여 병원에 요양중이라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92세인 Lois가 요즈음 부쩍 쇄약한 모습이라 염려된다. Barbara 와
Ann, Julia,도 점점 걸음걸이가 신통치 못하다. 점점 나이들면서
힘드는게 눈에 역역하건만 아무도 이런 Victorian Style의 Ladies’
Luncheon을 고만 두자는 사람은 아직 없다. 우리는 Current 시사,
Art, 자기가 읽은 책 소개나 여행담으로 화제의 꽃을 피우고 책 교환도
하는데 늘 시간이 모자란다.
이 친구들은 이곳 사회, 문화에 나를 이끌어 주는 mentor들이고
형제들이다. 모임 이름은 옛 시절에 아이들 키울때 함께 모여 바느질하며
담소를 나누는데서 시작한 모임이라 “Stitchery”라 부르는데, 지금은
한 땀 한땀 우정을 잇는 모임이라는 Metaphor이다. 뒤 늦게 내가 member가
된지 어언 이십년이 넘었다.
음식이 마음에 들게 잘 될가 신경이 쓰이지만 새로운 요리를 시험하고
대접하는 살림하는 여자로서의 작은 기쁨을 만끽하는 날이다."
개학이 되면 Museum에 나가서 Docent로서 봉사활동을 한다. 내게는 봉사라기 보다
내가 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많거니와 Intellectual한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내가
살고 있는 미국사회속에서 활동하는 기회이기 때문에 이 기회가 내게 주어진 것을
한없이 감사히 생각하며 열심히 시간을 쓴다. 새로운 전시회가 열릴때 마다 강의를
듣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training을 받고 책자를 읽고 공부해야 한다. 나에게 늘
지적으로 Challenge를 주는 만년 학교라고 생각하면서 기쁘게 종사한다. 내년이면
삼십년째가 된다. 할 수 있으면 2016년 6월까지 계속하고 은퇴할 계획이다.
이 미술관 관계로 또 하나 보람된 모임이 있다. Art Book Club이다. 이것는 격월로
미술계에 관한 서적을 선정하여 읽고 모여서 토론하는 모임이다. 물론 커피,
티타임을 곁들인 모임이다.
틈틈이 멀리 떨어져 사는 아이들을 차례로 찾아보고, 여행도 하고, 그러노라면
어느새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더구나 지난 유월 말로 남편이
삼십 팔년 종사하던 직장을 고만두고 은퇴를 하고 보니 우리는 거의 24시간을 함께
지내는 셈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우리는 한방에 있다. 처음에는 옛날
연애하던 기분으로 돌아가 새삼 다정한 사이가 되었는데 다정도 병이란가, 서로
모르던 단점이 보이기도 하고 작은 이견으로 서로 부딫치는 때도 없지 않지만
이래 저래 우리는 백년 해로하는 짝꿍이 아닌가, 함께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러
가면서 서로를 더 알게되고 서로를 더 보살피며 산다. 때로는 내 담당이였던 살림도
거들어 주고 장도 봐 주니 더할 수 없이 좋다.
나는 한국인 친구들이 그렇게 즐겨 시청하는 한국 영화 비디오를 빌리러 다니지
않는다. 향수를 달래고 추억을 불러오는 달콤하고 구수한 멜로 드라마가 정서에
도움이 되고 삶을 윤활하게 한다고 친구들이 권하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안이한
사치라고 생각한다. 미국에 살면서 한국에서 살듯이 하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영어를 더 유창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세상 물정을 듣고 토론할 수
있기를 바라고 성장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한국 비디오를
보며 안락하게 지낼 수가 없다. 책도 가급적이면 영어로 읽는다. 아직도 이 사회와
문화에 Assimilate하는데에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한 때문이다.
고마운 것은 나의 남편이 아직도 자기의 건강관리에 게으르지 않고 세 아이들이 각자
성실히 자기들의 자리를 견고히 하고 사회에 공헌하면서 자기들의 삶을 즐기고 있는
점이다. 큰 딸은 산부인과 의사인데 대학에서 만나 결혼한 내과 의사인 남편과 슬하에
세 아이를 두었고, 아들은 Manhattan의 Sky Scraper를 변형시키는 건축 사업에 뛰면서
역시 대학동창인 우리 며느리와 사이에 세 자녀를 두었고 막내딸도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역시 대학에서 만난 이비인후과 의사인 남편과 슬하에 세 아이를 두고 언니와
함께 미네아폴리스에서 산부인과 개업을 하고있다. 모두 내 못다한 몫을 하며 열심히
산다.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고마운 축복이다.
사랑하는 남편의 그림자같은 안사람으로, 셋이 여섯이 된 성장한 자녀들의 어미로,
아홉으로 늘어난 손자, 손녀들의 할머니로 나는 늘 시공을 뛰어 넘는 Happy Family
Affair를 관리하노라고 바쁘다. 년례 가족 휴가를 함께 가려면 스케쥴을 맟추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 모두 자기들 생활에 바빠서 나만큼 시간적이나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작은 우주속에서 내 나름대로 이리 저리 바쁘게
지내느라고 “아까운”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추수감사절 휴일을 타서 세 아이들 가족들이 모두 우리집에서 모였다.
만으로 열여섯살이 된 큰손자를 비롯하여 세살 반짜리 손자까지 도합 아홉명의
손주들과 세쌍 내외 여섯, 우리 두 양주까지 합하여 열 일곱식구가 한 지붕아래에서
나흘을 지내고 갔다. 도착하자 마자 지하층 스토레이지에 들어가서 자기 엄마, 아빠,
이모, 외삼촌이 가지고 놀던 사십년이 된 옛날 작난감들을 꺼내놓고 순식간에 발 디딜
틈 없는 수라장이 되지만 평온한 지난 세월이 새삼 따뜻이 안겨와서 나는 즐겁기만 하다.
고녀석들 떠난 뒤 텅 빈 방을 보면 서운함이 밀물처럼 밀려 오지만 마구 흐터진
장난감들을 하나 하나 선반에 줄 세우며 지나간 사십오년이란 세월을 손 안에 만지는
내 마음은 흐뭇한 미소로 가득 찬다.
연전 서울 신라 호텔에서 내려다 본 울창해진 남산의 소나무 숲은 한강변의 기적처럼
보였지만 우리가 자랄때 매년 식목일 마다 올라가 심은 묘목이 커서 울창해 진것 아닌가!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반세기 세월이 흐른 뒤니까.
겸허한 이런 나의 자리는 결코 헛된 자리도 아까운 인생이 흘러가버린 자리도 아님을
나는 안다. 나의 날들이 키워 준 묘목들이 언젠가 아름드리 나무로 숲에 가득하리라.
거기에 나는 기꺼이 걸음이 되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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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혹 오랫만에 만나는 옛 친구들에게서 “아깝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럴때 마다 내 마음은 서운했었다.
뭔가 내가 할 일을 다 못하고 산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기억하는 학창시절의 내 모습과 집에서
아이들이나(?)
키우고 있는 가정주부의 모습이 걸 맞아 떨어 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친구들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행복한가의 여부보다도 사회에 공헌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살림만 하는 일개 가정 주부로
지나는 모습에 실망한 것이리라.
한국의 정치적 격랑틈에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아픈 추억으로 멍든 어린 시절의
고난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조부모님 슬하에서 성장한 우리 남편과 대학에 들어
간지 몇개월만에 우리는 열애에 빠졌고 오랜 기간 동안의
연애 시절을 거쳐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남편 몰래 내 자신에게 내 생애의 가장 중요한 약속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꾸미겠다는 것이였다.
당시 의과 대학 재학시인 辛丑 6月 25日에
조부님께서 사랑하는 독자 종손을 위하여
“爲 孫子 聖九 題” 로 “將仁術 爲一生之業 窮眞理成百世之師” 라는
현판을 써 주셨는데
그 현판은 지금 남편 서제 벽난로 위 벽에서 가보 제 일호로 군림하며 생활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1929년에 미국 오버린 대학을 졸업하신 조부님의 가르치심을 받들어 남편은
인술로 만인의 지도자가 되고저 희망에
부푼 꿈을 안고 도미하였고 우리는 슬하에
세 아이들을 낳아 누구의 도움없이 세 아이들 키우느라고 나는 세상 물정이
어떻게
돌아 가는지 상관않고 살았다.
한때는 자식들에 대한 포부가 크셨던 친정 어머니의 권유로 학교에 다니며 젊은 야심을
살려 보려던 때도 있었으나
남편과 세 아이들 앞에 그 꿈은 하나의 사치였고 낭만이였다.
나와 이 사회는 오로지 남편과 아이들과, 아이들의
학교, 친구들과 그들의 부모들, 과외
활동들을 통해서 연결되었다. 성장해가는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학교를
다니며
언어의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운동의 Rule도 아이들의 활동을 통해서 배웠고,
요리도 아이들의 기호를
따라서 서양요리를 시도하기도 하면서 살았다.
우리가 미국사회의 문화와 풍습에 어두운 것을 고려하여 경제적으로 무리가 되었음에도
아이들 셋을 모두 사립학교에 넣었다.
돌이켜 보면 뱁새가 황새를 쫒아 다닌 셈이다.
다행히 세 아이들 다 명문 사립대학을 보낼 수 있었고 딸 둘은 저희들의
뜻대로 산부인과
전문의가 되었다. 아들은 당시의 Asian Male 들의 Stereo Type Image을 벗어나 공부만이
아니고
자기의 개성과 창작성을 살리며 운동, 음악, 연극등 분야에 적극 참여하더니
독창력을 발휘하는 사업계에 뛰어 들었다.
셋 다 자기들이 선택한 배우자와 결혼하고
사회에 떳떳한 일군으로 활약하고들 있으니 나는 마치 내 자신이 그들의 학위와
업적을
성취한 듯이 자랑스럽다. 이제 나는 그들 사이에 태어 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
손녀들에게 너그럽고
자애로운 할머니노릇 하기에 정신없으리 만큼 바쁘고 즐겁다.
어느날의 일기를 도리켜 본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남편에게 도시락을 싸들려
배웅하며 앞뜰에 나서서 우선 신문을 집어 들곤 꽃밭을 둘러 본다.
밤새 꽃송이속에
앉아 꽃잎을 포식하고 앉은 얌채 밉생이 풍뎅이 놈들을 한놈 한놈 잡아 비눗물에
잠수시키며 소탕
작전을 벌린 후 서둘러 아침 산책길에 오른다.
오늘따라 습기도 가시고
살랑 바람마저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아침이다. 아침 기온 화씨 65도이다.
집을 나서서
골목을 빠져 나와 동북쪽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오늘 아침 산책에는 목적이 있다.
이십여분 걸어서 Market Street에 자리잡은 Star Bucks에 들려 Coffee 한봉다리를 사는
일이다.
햇볕에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로 파아란 하늘에 뭉게 구름이 피어나고 이집 저집
앞뜰에는 가지 각색 여름 꽃들이
찬란히 또는 점잖케 고개들고 아침인사를 한다.
골프장을 끼고 걷는 산보길에는 골프장 Rough Area에 피어 있는
온갖 들꽃들이
여름 잔치를 벌리며 지나는 길손을 반긴다. 걸으면서 지나가는 차속의 출근하는
이웃들과 손 흔들며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미소와 함께 “Good morning!” 또는
“Beautiful morning!”을 동네 산책인들과
나누기도 한다. 이집 저집, 이골목 저골목의
각가지 다른 집 모습이며 정원을 살펴 보며 내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생각한다. 지금
의식 불명이 되어 생사를 헤메고 있는 친구가 기적적으로 깨어나기를 바래 보며,
그리워 하며,
이 생각 저생각, 혼자만의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면 한 시간이 어느새
가고 내 집 마당에 서게 된다. 뜰악의
꽃들에게 밤새 문안을 드릴 차례다. 오늘은
흰 장미가 피었고 백합은 그만 한 물 갔구나, 도라지도 그만 맥을 잃었고
Black Eyed Susan과 Petunia, Impatiens, 백일홍, 봉숭아,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한소큼 시원하게 물을
뿜어 주고
시도 때도 없이 자라는 잡초도 뽑아 준다.
이사 들어 온지 육년이 되니 꽃과 나무들이 제법 성숙하여 금년 여름 뜰은 화려하다.
더구나 디스크 수술을 받은 후
골프를 고만 두고 나니 시간이 많아 꽃들에게 정성
쏟기를 아이들 돌보듯 하니 꽃들이 그런 내 마음을 아는 듯 다투어
피어 서로 칭찬을
받으려는 듯 닥아 온다. 갖가지 벌 나비, 벌새, 새들이 놀러 온다. 물론 불청객인
Japanese Beetle도
끊임 없다. 장미만 먹지 않으면 그냥 두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눈만 뜨면 나는 고놈들 소탕을 해야만 한다.'
한달에 두어번 친구들과 점심 모임이 있다. 한 모임은 모두 한국인 친구들인데
멤버가 이사가고 이사오는 바람에 여럿이
바뀌기는 했으나 사십 이년째 계속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어린 아이들 데리고 모여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북석을
떨었건만
아이들이 다 크고 떠난 후에는 어찌된 일인지 넓은 집 두고 음식점에서 만나서 떠들다가
헤어진다.
또 하나는 일곱명의 Museum Docent 친구들 모임인데 이날만은 어느 집에서 모이건
자기들의 제일 아름다운 그릇과
Crystal 유리잔들, 은수저들을 Table Cloth를 덮은
Formal Dining Room에서 Candle Light을 켜고
Wine 을 겯드린 Luncheon Group이다.
모두 나보다 연세들이 높으신 분들이고 점점 나이 들면서 힘이 들기는 하지만
아무도
이런 Victorian Style의 Ladies’ Luncheon을 바꾸려는 사람은 없다. 대개는 Current 시사,
Art,
자기가 읽은 책 소개나 여행담으로 화제의 꽃을 피우고 책 교환도 하는데 늘 시간이
모자란다. 이 친구들은 이곳 사회,
문화에 나를 이끌어 주는 나의 mentor들이고 형제들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모임에는 빠지지 않는게 모든 member의
철칙이다. 모임 이름은
옛 시절에 아이들 키우며 살림하던 때, 함께 모여 한 땀, 한 땀씩 바느질하곤 했다 해서 “Stitchery”,
지금은 한 땀 한땀 우정을 잇는 모임이라는 Metaphor이다. 뒤 늦게 내가
member가 된지 어언 이십년이 넘었다.
개학이 되면 Museum에 나가서 Docent로서 봉사활동을 한다. 내게는 봉사라기 보다
내가 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많거니와 Intellectual한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내가
살고 있는 미국사회속에서 활동하는 기회이기 때문에 이 기회가
내게 주어진 것을
한없이 감사히 생각하며 열심히 시간을 쓴다. 새로운 전시회가 열릴때 마다 강의를
듣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training을 받고 책자를 읽고 공부해야 한다. 나에게 늘
지적으로 Challenge를 주는 만년 학교라고
생각하면서 기쁘게 종사한다.
이 미술관 관계로 또 하나 보람된 모임이 있다. Art Book Club이다. 우리는 격월로
미술계에 관한 서적을 선정하여
읽고 모여서 토론하는 모임이다. 물론 커피, 티타임을
곁들인 모임이다.
틈틈이 멀리 떨어져 사는 아이들을 차례로 보러 가고, 여행도 하고, 그러노라면
어느새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더구나 지난 유월 말로 남편이
삼십 팔년 종사하던 직장을 고만두고 은퇴를 하고 보니 우리는 거의 24시간을
함께
지내는 셈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우리는 한방에 있다. 처음에는 옛날 연애하던
기분으로 돌아가
새삼 다정한 사이가 되었는데 다정도 병이란가, 서로 모르던 버릇이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서로 부딫치는 때도 없지 않다.
더구나 내가 외출하는 일이
더 많고 보니 조금은 불편한 때가 없지도 않지만 이래 저래 우리는 백년 해로하는
짝꿍이
아닌가, 서로를 더 배운다.
나는 한국인 친구들이 그렇게 즐겨 시청하는 한국 영화 비디오를 빌리러 다니지
않는다. 향수를 달래고 추억을 불러오는
달콤하고 구수한 멜로 드라마가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삶을 윤활하게 한다고 친구들이 권하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안이한
사치라고
생각한다. 미국에 살면서 한국에서 살듯이 하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영어를
더 유창하게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세상 물정을 듣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라고 성장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한국 비디오를
보며 안락하게 지낼 수가
없다. 책도 가급적이면 영어로 읽는다. 골프가 일정에서 없어지니 한가스러운 Pace of Life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고마운 것은 나의 남편이 아직도 자기의 건강관리에 게으르지 않고 세 아이들이 각자
성실히 자기들의 자리를 견고히 하고
사회에 공헌하면서 자기들의 삶을 즐기고 있는
점이다. 큰 딸은 산부인과 의사인데 대학에서 만나 결혼한 내과 의사인 남편과
슬하에
세 아이를 두었고, 아들은 Manhattan의 Sky Scraper를 변형시키는 건축 사업에 뛰면서
역시 대학동창인 우리
며느리와 사이에 세 자녀를 두었고 막내딸도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역시 대학에서 만난 의사인 남편과 슬하에 세 아이를 두고
언니와 함께 산부인과
개업을 하고있다. 모두 내 못다한 몫을 하며 열심히들 산다.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고마운 축복이다.
사랑하는 남편의 그림자같은 안사람으로, 셋이 여섯이 된 성장한 자녀들의 어미로,
아홉으로 늘어난 손자, 손녀들의 할머니로
나는 늘 시공을 뛰어 넘는 Happy Family
Affair를 관리하노라고 바쁘다. 년례 가족 휴가를 함께 가려면 스케쥴을 맟추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 모두 자기들 생활에 바빠서 이 일은 나에게 일임한다. 나만큼 시간적이나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작은 우주속에서 내 나름대로
이리 저리 바쁘게 지내느라고 “아까운”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전 서울 신라 호텔에서 내려다 본 남산의 소나무 숲은 한강 변의 기적처럼 보였지만
우리가 자랄 때 매년 식목일 마다
올라가 심은 묘목이 커서 울창해 진것 아닌가!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반세기 세월이 흐른 뒤니까.
이번 추수감사절 휴일을 타서 세 아이들이 자기 가족들과 모두 우리집에서 모였다.
열여섯살이 된 큰손자를 비롯하여
세살 반짜리 손자까지 도합 아홉명의 손주들과
세 아이들 내외 여섯, 우리 두 양주까지 합하여 열 일곱식구가
한 지붕아래에서
나흘을 지내고 갔다. 도착하자 마자 지하층 스토레이지에 들어가서 자기 엄마, 아빠,
이모, 외삼촌이
가지고 놀던 사십년이 된 옛날 작난감들을 꺼내놓고 순식간에 발 디딜
틈 없는 수라장이 되지만 평온한 지난 세월이 새삼
따뜻이 안겨와서 나는 즐겁기만 하다.
고녀석들 떠난 뒤 텅 빈 방을 보면 서운함이 밀물처럼 밀려 오지만 마구 흐터진
장난감들 하나 하나 선반에 줄 세우며 지나간 사십년 세월을 손 안에 만지는 내 마음은
보람으로 넘친다.
겸허한 이런 나의 자리는 결코 헛된 자리도 아까운 인생이 지나간 자리도 아님을
나는 안다. 꾸준히 기르고 닦은
나의 날들이 키워 준 울창한 숲이다. 아름드리 나무로
가득하리라. 거기에 나는 기꺼이 걸음이 되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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